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HUFS 에세이
시간과 나
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기본이 흑백이고 칼라 필름은 비싸서 결혼식이나
2006년 연구년으로 시카고에서 일년 동안 지냈다. 아사히팬택스 카메
환갑잔치 같은 집안 행사가 있을 때 찍는 것으로 생각했다. 그래도 돈이
라는 이미 몇 년 전에 고장이 났다. 캐논 소형디지털 카메라를 하나 샀
생기면 필름을 사서 여기저기 찍어댔다. 그때부터 찍은 필름을 일련번호
다. 필름 값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 마음 편하게 사진을 찍었다. 동쪽 건
를 붙여 정리하고 보관했다. 그 필름들을 지금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.
물들 사이사이로 미시간 호수가 살짝살짝 보이는 고층아파트에 살았다.
대학 때는 또 다시 입학선물로 방 한구석에 암실장치를 마련해서 사진을
창문 밖으로 미시간 호수를 끼고 보이는 건물 사이의 손바닥만한 작은
현상하고 인화도 해 보았다. 암실은 사실 밤에 방에 불을 끄고 작은 빨간
공원 River East Park는 시시각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. 동쪽의
조남신 교수 (경영학부)
전구를 켜는 것이었다. 식구들이 모두 잘 때 밤을 새워 이것저것 인화하
미시간 호수에서 떠오르는 해는 건물의 그림자를 공원으로 길게 드리운
고 오리고 하다 보면 날이 밝았다. 그러면 암실은 없어진다. 어슴프레 날
다. 시간에 따라 건물 사이사이로 햇빛이 옮겨다닌다. 저녁때는 우리집
이 밝아올 때 느끼는 아쉬움과 피곤함, 뿌듯함 등이 섞여 있는 그 느낌이
뒤편 서쪽으로 지는 붉은 해가 건물에 반사되어 보인다. 땅거미가 지면
중·고등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다.
지금도 몸 한 구석에 남아있다.
불들이 하나씩 들어오고 건물들은 오묘한 푸
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3년간 다시 있는
른빛과 짙은 보라빛을 내뿜는다. 한밤중에는
힘을 다해 공부해서 원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다.
어머니 생신에 온 가족이 집에 모였다. 당연히
깜깜한 가운데 불빛들만 어른거리는 것처럼
1971년 당시 고등학생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
가족들의 사진을 찍는 것은 내 몫이었다. 마당
보인다. 시카고의 겨울은 지독하게 춥다. 그 큰
낼 카메라를 입학선물로 원했다. 어렵사리 중고
에서 뛰어노는 조카들의 모습을 열심히 찍었
미시간 호수가 얼어 푸른빛 얼음이 건물 사이
아사히펜택스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가지게
다. 공을 던지고 좋아라고 웃는 세 살짜리 조
로 보인다. 눈이 많이 온다. 낮에도 눈이 오고
되었다. 당시 그와 같은 카메라를 가진 친구는
카의 모습을 찍었다. 6월 늦은 오후에 머리 뒤
밤에도 눈이 온다. 어디가 하늘이고, 땅, 호수,
전교에서 나 하나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.
에서 따뜻한 햇빛이 비치는 잔디밭에서 마음
건물인지 온통 회색세상에 크고 작은 흰 점들
전교는 물론 전국에서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를
껏 웃는 조카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럽다. 지
을 뿌려놓은 것처럼 보인다. 눈 온 다음날 초저
가진 고등학생은 몇 안 되었을 것이다. 참으로
금까지 내가 찍은 모든 사진 중에서 가장 잘
녁 안개 속에 공원이 붉은 빛으로 보인다. 제
소중하고도 자랑스러운 나의 분신처럼 아끼고
찍힌 사진이라고 생각한다. 오랜 시간이 지나
아무리 추운 겨울도 봄이 오면 녹기 시작한다.
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. 그때 왜 하필이면
서 잊고 있었는데 인화액 온도와 시간을 달리
봄에는 안개가 많이 낀다. 어느 날은 안개가 짙
카메라를 원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.
해 여러 번 뽑아보아 원하는 명암과 콘트라스
게 끼어 건물이 하나도 안보이고 어느 날은 반
그냥 카메라가 좋아보였고 나도 사진을 찍어보고
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가는 붓과 먹물로 며
밖에 안 보인다. 눈이 녹고 잔디가 점점 푸르
싶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들어 있었던 것 같다.
아주 어렸을 때 주변의 사소한 물건들을 하루
칠씩 밤을 새워 먼지자국을 없애는 아날로그
스름해진다. 햇빛도 점점 굵어진다. 시간이 지
종일 이리저리 들여다보곤 했던 나 자신에 대한
식 ‘뽀샵’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. 중앙일보 독
날수록 잔디는 진해지고 햇빛은 눈부셔진다.
최초의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는데, 아버지
자사진 컨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았다. 그 조카
내 눈앞의 작은 세상은 온통 투명한 초록빛으
시계를 햇빛에 비춰보면서 무지개 빛깔이 천장에
는 지금 마흔 살이 넘은 중학생 엄마가 되었다.
로 물들어간다. 이 모든 시간을 합할 때 전체
반사되는 모습을 신기하게 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.
로서 내가 본 River East Park가 된다. 여름의
이것저것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좋아했던 것에서
대학시절에는 주로 인물사진을 찍었다. 사실
시카고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. 집
사진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.
그 전에도 그렇고 그 후에도 쭉 그랬다. 대부분
앞의 공원 잔디밭에서 저녁때 열리는 무료음
의 일반인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. 굳이 인
악회에 와인 한 병을 들고 나가 아내와 같이하
물사진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자친구를 만나
는 시간은 더없이 행복하다.
면서 그 친구를 집중적으로 찍었기 때문이다.
데이트하며 카메라를 자주 들고나갔다. 다행히 여자친구는 사진 찍히는
요즘 집에서 멀지 않은 선릉에는 시간의 흐름이 뚜렷하다. 봄바람에 진
것을 좋아했다. 외모에 자신이 있었던 것일까? 졸업을 앞둔 크리스마스
분홍 철쭉이 흐드러진다. 봄바람에 흔들리던 연록색 단풍잎이 가을에
에 여자친구의 전신을 찍은 사진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큰 사이즈로
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. 그러나 시간이 차지 않으면 내가 기대하는
뽑아서 액자에 담아 선물했다. 그리고 1년이 좀 지나서 그 여자친구와 결
단풍잎은 없다. 시간이 차기를 기다렸다. 같은 자리를 찾아갔으나 기대
혼을 했다. 결혼에 골인하는데 사진이 기여를 했을까? 그게 잘한 일인
하던 단풍은 보이지 않았다. 대신 이곳 저곳을 다니며 단풍을 찾았다. 새
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지만 그 액자는 지금도 내 서재 잘
빨간 단풍을 기대했으나 빨간색, 주홍색, 주황색, 노란색이 섞인 단풍이
조남신 교수는 현재 한국외대 경영대학 경영학부 교수로 재직
보이는 자리에 있다. 아내와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으면 지금도 내 옆에
더 예쁘게 보였다. 근처의 억새도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.
중이며, 프로를 지향하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. 작년
누워있는 사람은 그 사진 속의 여자다.
12월에는 KMDI(한국경영연구원)에 소속된 회원 10명과
함께 사진 전시회 ‘나다(NADA)’전을 열기도 하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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